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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칠궁

산림교육전문가 2020. 5. 30. 14:31

2020년 5월 27일 옛 직장 OB 멤버들이 코로나19로 그간 얼굴도 보지 못하고 외부 나들이를 못하였는데 다소 진정기 미도 있고 하여 역사 문화 탐방으로 청와대 옆 칠궁을 찾았다.

이제 80세 나이에 가까운 대선배님이 계시고 50대 후배도 있는 나이가 다양한 28명이 함께 하였네요

칠궁은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청와대 내)에 위치한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어머니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장소로 종묘에 들어갈 자격이 안 되는 후궁들이며 법적 어머니인 왕비에게 바치는 효와는 별개로 생모에게 바치는 사적인 효를 위해 세운 곳이다

원래는 한성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영조가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육상궁'을 건립한 이후 1908년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들어와 모두 7개의 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칠궁(七宮)이라고 한다.

1.21 사태로 2001년24일 일반에게 개방되었으나 청와대 관람코스에 들어 있기 때문에 따로 요청해야 갈 수 있었으나 2018년부터 별도 코스로 개방하였으며 보안상 문제로 담 넘어 청와대를 찍으면 안 된다.

냉천정(冷泉亭)이라는 현판이 걸렸는데 정자 건물 같지는 않은 건물이며 냉천(冷泉)'찬우물'이고 '차다'에는 '맑고 시원하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영조가 어머니를 위해 이곳에 어진을 보관했으나 지금은 없다.

왕은 적장자 계승 원칙이나 적장자는 7분밖에 없다.

금수저 : 적장자승계 = 문종(5), 단종(6), 연산군(10), 인종(12), 현종(18), 숙종(19), 순종(27),

흑수저 : 빈의 자손

중종 6부인 창빈 안 씨=> 덕흥대원군=> 선조

선조 4부인 인빈 김 씨=> 원종(정원군)=> 인조

숙종 5부인 숙빈 최 씨(무술인) => 영조

영조 4부인 영빈이 씨=> 장조(사도세자)-혜경궁홍씨=>정조

숙빈 임씨=>은언군=>전계대원군=>철종농부(강화도령)

                은신군=>남연군=>흥선대원군=> 고종

 

칠궁의 자리는 궁을 바라보고 좌측이 상석으로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으로 광해군 이후 인조의 아버지가 추존왕 원종이 되고 선조의 할머니이다. 대빈궁은 숙종의 후궁으로 경종의 어머니로 왕후가 된 후 폐위된 장희빈으로 다른 궁과 격을 달리 격상하여 기둥이 원형이며 문짝의 형태도 다르다. 

또한 한건물에서도 현판의 위치가 안쪽이 어른이다. 선희궁은 사도세자(장조)의 친 어머니로 영조의 후궁 영빈 이 씨이며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어머니로 2분 사이는 시할머니와 손자며느리다.

연호궁은 사도세자의 법적인 어머니로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 씨로 효장세자(진종)의 부인이다. 두 분 사이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다. 칠 궁 중에서 육상궁의 현판은 육상묘(廟 사당묘)로 다르다. 육상궁이 1882년 화재로 옛 격상 전의 현판으로 추정된다.

덕안궁은 영친왕의 어머니이며 고종의 후궁으로 귀빈 엄씨를 모신 사당으로 1911년 엄씨가 세상을 뜨고 1913년 태평로 사당에 모셨다가 1923년 육상궁 안으로 모셔 이곳이 칠궁이 되었다.

청와대 수궁터

수궁터 : 청와대가 위치한 지역은 옛날 풍수지리학상 길지로 알려져 900년 전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이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 경복궁이 창건되며 경복궁 후원이 되었으며, 고종 5(1868) 경복궁이 중건된 후에는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守宮)과 경무대(景武隊용문당·경농대·벽화실·오운각 등 총 232칸의 건물과, 농사가 국가의 근본임을 상징하는 논이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의 건물로 사용하면서 후원에 있던 건물들을 허물고, 19397월 그 자리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그 후 1945년부터 시작된 미군정기에는 미군정사령관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경무대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면서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다 - 네이버 지식 자료

무궁화동산 칠궁안내소 앞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궁정동 안가가 있던 곳이다. 김영삼 정부때 안가를 헐고 무궁화동산을 만들었다.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진 것은 법이나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독립협회 등의 애국단체 회원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지키고자 강연회 때마"우리 무궁화동산 ······"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 ······" 등으로 절규함에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고 일제시대 때는 박해도 받은 나무다.

무궁화 종류는 크게 3가지로 중앙에 붉은색이 있는단 심계와 흰색인 배달계 그리고 단심계에 꽃잎이 반쪽이 붉은 아사달계로 무궁화는 목근(木槿)의 음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 '목근 무근 무궁'으로 변음이 되고 여기에 한자음을 맞추어 '무궁화'로 표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무궁화동산 지역은 인조때 병자호란 당시 항복을 끝까지 거부한 김상헌의 집터였다고 하며 1640년 청나라로 척화의 대표인물로 지목되어 끌려가며 지은 시비가 있다.

숲해설가로 창경궁에서 왕의숲 해설과 OB모임 여행회 회장으로 최근 코로나19로 고궁에서의 해설이 중단되어 내가 자료를 찾아보며 선, 후배들에게 해설을 하게 되어 나로서는 부담이 되었으나 보람 있는 하루였다.

관람이 있은 후 식사는 코로나19가 빨리 종식되고 회원들이 잘 극복해서 건강을 지키자고 삼계탕으로 보신을 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코로나19로 인하여 다다음날부터 칠 궁 관람은 잠시 중단되었다.